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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師公先山俗傳記

 

山在忠淸南道公州錦江北公州市新官 洞꾈木里

壬坎來龍卯入首艮坐坤向丙得水酉破以再見再破言之則丙得水庚破庚得水癸破

形則稱以渴龍飮水形山名則稱以石傍峴돌곁재

自古傳說全義李太師先代居住錦江邊接濟往來行旅施惠甚周廣有過去異僧來到錦江知其爲積德之人指示艮穴曰葬此則子孫繁延錦水不竭李氏不絶云云至今近千年土人莫不指點爲李太師先山盖太師公以護涉錦江有功於麗太祖則太師公之世居公州此固可徵旣居公州則先山之在錦江上亦不爲異而但太師公後居于全義縣雲住山下卽今所稱李城遺址

子孫遂以全義爲姓貫之鄕公州山則無文獻取考者亦不知太師公以上某代葬地故後孫知敦寧府事徵夏曾任公州牧時治石拒書以全義李太師先山欲堅立而宗中諸議不無異同置在塋域之側矣英宗辛酉年徵夏季子德顯又爲本州判官以爲本土傳說其來已久終不可歸之疑誕乃立前日所置表石于墓前仍爲禁伐之地今此譜牒重修時不可仍無文蹟될述傳說根因立石事由以備日後傳攷英祖甲戌修譜時縣監德容編述近見眞陽齋集中唐僧朱昊或云瑚

 

所記云淳化辛卯或云元和辛卯而淳化則年代不相符合

十月日到錦江之津頭善유師之寬仁指一穴於江之北至近之地許葬其父卽艮坐原巽巳丙丁之水瀉於酉地而大抵萬代榮貴大發福之大地也非假之仁善實難得之地然而余見李芳伊之至孝必有後矣故許與之葬其父碩才於是年十一月初九日丑時乃辛卯己亥壬寅辛丑論以天文則地雷復有七日來復底意推之地理則火水未濟有花未開月未圓之象葬此二百年後子姓大振天許地與故余亦感其仁孝之德許而記之耳云此說與舊譜所載先山俗傳盖略相似而旣有兩代諱字雖非公家文통不可闕焉故今番重修時追錄以備後攷

高宗庚子修譜時追錄

編述者  未詳

 

 

  譯文

 

태사공(太師公) 선산(先山)에 관(關)한 전설(傳說)

산소(山所)가 있는 곳은 충청남도 공주(公州) 고을 금강의 北쪽(現 공주시公州市 신관동新官洞 시목부락꾈木部落)이다.임감(壬坎) 내룡(來龍) 묘입수(卯入首) 간좌(艮坐) 곤향(坤向)이고 병득수유파(丙得水酉破,재견재파再見再破)를 말하자면 병득수경파(丙得水庚破) 경득수계파(庚得水癸破)이다.형국은 목마른 용(龍)이 물을 마시는 형(形)이고 산 이름은 석방현(石傍峴,돌곁재)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전의이태사(全義李太師)의 선대(先代)가 살면서 행여인(行旅人)을 접대구제(接待救濟)하여 크게 은혜를 베풀었더니 어느날 괴이한 중이 금강(錦江) 가에 이르러 적덕한 사람을 알아보고 좋은 묘자리를 잡아 주면서 말하기를,이곳에 장사지내면 자손이 매우 번성하여 금강(錦江)물이 마르지 않는 한 이씨(李氏)는 끊어지지 않으리라라고 말하였다는 것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千年에 가까운 데도 그 고장 사람들은 이 묘를 가리켜 이태사(李太師)의 선산(先山)이라고 지칭하지 않는 이가 없다.

 

생각건대 태사공(太師公)께서 금강(錦江)에서 고려 태조를 호섭(護涉)한 공(功)이 있었다고 한다면 공주(公州)는 태사공(太師公)의 세거지(世居地)임이 분명하며 이미 공주(公州)에서 살고 있었다면 선산(先山) 또한 금강(錦江) 가의 어디엔가에 있어야 함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다만 태사공(太師公)께서 뒷날 전의현의 운주산(雲住山) 아래 즉 지금의 이성(李城)이라 부르는 성지(城趾)에 사셨기에 마침내 자손이 전의(全義)로 성(姓)의 관향을 삼았다.공주(公州)의 산소(山所)에 관한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없으며 또한 태사공(太師公)의 위로 몇 代의 묘소인지도 알 수 없는 관계로 후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징하(徵夏)가 공주목사 재임시에 돌을 다듬어 전의이태사선산(全義李太師先山)이라 새겨 입비(入碑)코자 하였으나 종중의 의논이 같지 아니하여 묘역 발치에 버려 두었다.영조(英祖) 신유년(辛酉年)(一七四一)에 징하(徵夏)의 계자 덕현(德顯)이 또한 공주판관이 되었을 때 이 고장에 전래된 전설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끝끝내 의심되고 허탄(虛誕)하다고만 할 일이 못된다 하여 지난날 버려 두었던 표석(表石)을 묘앞에 세우고 아울러 금벌지(禁伐地)로 삼아 수호하여 왔다.

금번(英祖 甲戌年) 보첩중수(譜牒重修)에 즈음하여 관련되는 문적(文蹟)이 없어서는 아니되겠기에 전설의 근원(根源)과 사연(事緣)을 기술하여 후일 사실을 상고하는 데 대비하는 바이다.(英祖 甲戌 修譜時에 현감 德容 씀)

 

근자(近者)에 진양재집(眞陽齋集)을 보았더니 당(唐)나라 승려(僧侶) 주호(朱昊,혹은 朱湖라고도 함)의 기록(記錄)이 실려 있었다.이에 이르기를 순화신묘(淳化辛卯)(或은 元和辛卯라 하나 淳化는 年代가 서로 맞지 않는다) 十月 어느날 금강(錦江) 나루터에 이르러 착한 사공의 너그럽고 인자(仁慈)함에 금강(錦江) 北쪽 아주 가까운 곳에 산소(山所) 자리 하나를 잡아 주고,그 아버지를 장사(葬事)지내게 하였으니 卽 간좌(艮坐)의 언덕으로 손사병정방(巽巳丙丁方)에서 흘러오는 물이 유방(酉方)으로 흘러 나가니 대체로 만대(萬代)토록 영귀(榮貴)하고 크게 발복(發福)할 대지(大地)로서 어질고 착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얻기 어려운 자리이다.그러므로 나는 이방이(李芳伊)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을 후일(後日)에 반드시 경복(慶福)을 누릴것이기에 이 자리를 그에게 주어 그의 아버지 석재(碩才)를 장사(葬事)지내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가 그 해 十一月 初九日 丑時이니 卽 辛卯年 己亥月 壬寅日 辛丑時이다.천문(天文)으로 논(論)하자면 지뢰복괘(地雷復卦)로서 七日 만에 원점(原點)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이 있고 지리(地理)로 미루어 헤아려 본다면 수화미제괘(水火未濟卦)이니 꽃이 아직 피지 아니하고 달이 아직 둥글지 아니한 형상(形象)이므로,이곳에 장사(葬事)를 지낸 지 二百年後에는 대진(大振)하는 자손(子孫)들을 하늘이 돕고 땅에서 받들 것이므로 나 역시 인자(仁慈)하고 부모(父母)에게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한 그 덕(德)에 감격(感激)하여 묘(墓) 자리를 허락하고 이에 기록(記錄)하노라 하였다더라.

차설(此說)은 구보(舊譜)에 실려 있는 선산속전(先山俗傳)과 대략 비슷한데 다만 양대(兩代) 휘자(諱字)가 현출(顯出)된 점이 다르다.차설(此說)의 전거(典據)가 공인(公認)된 문헌(文獻)이 아니기 때문에 신빙성(信憑性)이 약(弱)하다고는 하지만 없앨 수는 없겠기로 이번 수보시(修譜時)에 추록(追錄)하여 후일(後日)에 비고(備攷)코자 한다.

고종(高宗) 경자보(庚子譜) 수보(修譜)할 때 추록(追錄)하였고 편술(編述)한 자 미상(未詳)

 

 

 

 

원화(元和)는 당(唐)나라 헌종(憲宗)의 연호(年號)로서 西紀八○六年에서 同八二○年이며 辛卯年은 同八一一年이 된다.그러므로 진양재집(眞陽齋集)의 당승(唐僧) 주호(朱昊)는 당(唐)나라 승려(僧侶)를 가리킴이니 원화신묘(元和辛卯)는 당(唐)나라 헌종(憲宗) 八年이고 보면 고려(高麗) 개국년대(開國年代)보다 一百八年에서 一百二十六年前이되므로 인효(仁孝)의 덕(德)이 높으신 이방이(李芳伊)께서는 태사공(太師公)의 四·五代 위가 되리니 공주(公州) 선산(先山)의 석재(碩才)께서는 태사공(太師公)의 五·六代가 된다고 추산(推算)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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